러닝의 본질 · 에세이 시리즈 ③
하루를 떠올려 보세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누군가의 무엇입니다. 회사에서는 직원, 집에서는 부모나 자식, 단톡방에서는 대답해야 할 사람. 알림은 쉬지 않고 울리고, 온전히 ‘나’로만 존재하는 시간은 좀처럼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한 시간, 그 모든 역할이 벗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혼자 달리는 시간입니다.
이 감각을 평생에 걸쳐 탐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심장내과 의사이자 러닝계의 철학자로 불린 조지 시언(George Sheehan)입니다. 지난 편에서 무라카미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편은 달리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돌려주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흔다섯, 다시 달리기 시작한 의사
조지 시언은 심장 전문의였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커리어와 대가족을 이룬 성공한 중년이었죠. 그런데 마흔다섯 살, 그는 문득 자신이 ‘직함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이후 놓았던 달리기를 다시 시작해요. 뒷마당에서 혼자, 아무 목적 없이.
그 경험은 그의 삶을 바꿨습니다. 그는 러너스월드(Runner’s World)에 오랫동안 칼럼을 연재하며 잡지에서 가장 사랑받는 필자가 되었고, 러닝 철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Running & Being(달리기와 존재)』를 썼습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우리는 왜 달리는가, 그리고 달리기는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가.
“달리기는 현대 문명이 앗아간 시간을 돌려준다”
시언의 러닝 철학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달리기는 현대 문명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 하나를 되돌려준다고 — 바로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라고요.
달리는 그 시간만큼은, 나는 의사도 아버지도 유명인도 아니었다. 그저 달리는 한 사람이었다.
이건 앞서 1편에서 이야기한 진화의 관점과도 이어집니다. 하루 종일 앉아 화면을 보는 삶은 우리 몸의 설계와 어긋나 있고, 달리기는 그 어긋남을 잠시 되돌립니다. 몸이 제자리를 찾으면 마음도 따라옵니다. 시언에게 달리기는 운동이 아니라 ‘나에게 돌아가는 의식(ritual)’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근육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다”
심장 전문의였던 그가 남긴 역설적인 말이 있습니다.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심장도, 다리 근육도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몸의 한계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마음이 먼저 그은 선이라는 통찰입니다. (이 이야기는 ‘4분의 벽’을 다룰 5편에서 더 깊이 이어집니다.)
또 하나, 그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우리는 모두 운동선수다. 다만 어떤 사람은 훈련 중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 뿐이다.” 달리기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보편적인 길이라는 뜻이죠. 지금 막 첫 5km를 걷듯이 뛰는 초보 러너도 이미 ‘운동선수’입니다.
달리기가 알려준 마지막 교훈
시언의 이야기에는 뭉클한 결말이 있습니다. 그는 말년에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시간에도 계속 달렸고, 달리기가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들 —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법 — 이 삶의 마지막을 마주하는 데에도 그대로 쓰인다는 것을 글로 남겼습니다.
결국 그가 평생 달리며 발견한 것은 “잘 달리는 법”이 아니라 “잘 사는 법”이었습니다. 달리기는 그 연습장이었던 셈이죠.
오늘의 한 시간
그러니 다음에 달리러 나갈 때는, 그 시간을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하루의 한 시간’으로 여겨보세요. 이어폰의 팟캐스트도, 목표 페이스도 잠시 꺼두고요. 알림도 역할도 없는 그 고요 속에서, 시언이 마흔다섯에 뒷마당에서 발견한 그것을 당신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달리기는 우리에게 시간을 돌려줍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시간을 ‘혼자’ 보내는 일에 대해 — 소설 『고독한 장거리 주자』가 말하는 홀로 달리는 자의 자유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부상 없이, 안런 하세요.
📎 참고 · 조지 시언 (위키백과)
📚 러닝의 본질 — 연재 목차
- 우리는 왜 달리는가 — 인간은 달리도록 태어났다
-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무라카미)
- 달리기는 나에게 ‘시간’을 돌려준다 (조지 시언) ← 지금 읽는 편
- 혼자 달리는 자의 자유 — 고독의 의미 (예정)
- 한계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예정)
- 러너스 하이는 왜 오는가 — 본질의 과학 (예정)
- 결국, 달리기는 삶의 은유다 (예정)
◀ 이전 편 고통과 괴로움 (무라카미) | 다음 편 ▶ 혼자 달리는 자의 자유 (예정)
#러닝의본질 #조지시언 #RunningandBeing #러닝에세이 #달리기철학 #러닝의시간 #마음의근육 #러닝입문 #혼자달리기 #마라톤